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제국 (문단 편집) == 특징 == '''서기 4세기 이후의 후기 로마 제국''' 등으로 불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의 로마 제국에서 [[사두정치|분담 통치]]는 낯설지 않은 국가 통치 방법 중 하나였다. 실제 서기 395년 이후의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로마 황제들의 정부 분할은 [[테오도시우스 왕조]] 아래에서의 동•서 분할 이전부터 있었다. 따라서 이런 점만 생각해보면, 테오도시우스 1세가 두 아들을 위해 만들어낸 제위 계승 방식이 아니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흔히 '''로마 제국의 분할'''로 불리는 서기 395년 1월 이전부터 로마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로마법과 국제 개혁의 조치 아래에서 2명 이상의 황제를 중심으로 한 체제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두정치]]로 번안되는, '''테트라키아'''(Tetrarchia)인데, 로마 제국은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막시미아누스]]를 카이사르(부제)로 삼았다가, 이듬해 아우구스투스(정제)로 임명하면서 그에게 서로마 일대의 관할권을 책임지도록 했다. 이는 과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두 손자들인 [[게르마니쿠스]]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자신의 후계자인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사후 공동 집정관 형태로 나란히 제국을 물려주기로 계획한 것과 그 본질이 달랐으며, 서기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존속 당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공동황제 취임과도 그 결이 다른 국제 개혁 내지 개헌이었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역사를 '''[[도미나투스]]'''(전제군주제) 등장부터 설명한다면, 서기 285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허나 이는 로마 제국의 국제 개혁부터 살펴봐야 되는 문제인데다가,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의 제국은 서기 395년 이후처럼 극단적으로 두 개의 행정부가 각자의 관할을 가지고 운영되는 형태로 존속하지 않았다. 쉽게 설명하면, '''테트라키아로 불리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은 로마 제국이 물리적으로 아우구스투스를 사용하는 임페라토르 아래에서 복수의 분할이 가능하다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393년 1월 23일 이후부터의 로마 제국은 당대와 후대의 로마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복수의 분할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황제의 두 아들이 동부와 서부 정부를 통치한다고 해도 끝내 영구적인 분할처럼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분할 아래 두 개의 정부는 이전부터 서로 다른 언어의 사용 빈도와 경제 기반 등이 조금씩 멀어지면서 하나의 국가 아래 두 정부였다고는 해도, 로마인들의 생각과 달리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항구적인 분단 내지 쪼개진 제국 형태로 인식되었다. 395년 1월,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메디올라눔([[밀라노]])에서 붕어하자 [[아르카디우스]]는 제국 동부를, [[호노리우스]]는 제국 서부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제국은 훨씬 이전부터 동-서 양 영역에 각각의 황제가 군림하며 통치하는 체제가 지속되어 왔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치세 이후, 이미 동-서에 각각 정제와 부제가 있었으며, 한동안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콘스탄티우스 2세]], [[율리아누스]]의 치세하에서 통일된 적은 있었지만, 이후 다시 양쪽의 영역으로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사실 [[테오도시우스 1세]]의 통일도, 서방 참칭제 [[에우게니우스]]를 토벌한 394년 9월부터 그가 붕어한 395년 1월까지의 불과 수개월에 불과했던 찰나의 기간이었다. 제국의 분할 통치가 영속화되었다는 의미에서 395년을 흔히 분열의 시기로 말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후에도 동-서 두 제국은 '하나의 로마'라는 보편적인 인식을 유지했으며, 서기 5세기의 다사다난했던 정세 속에서 지속적으로 정치적인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로마 제국의 분열",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이라는 용어는 후대에 역사 서술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도 엄밀히 말하면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 상실'''이다. 분할 이전부터 자금력이나 군사력 면에서 우위를 점했던 제국 동부와는 달리 제국 서부는 상대적으로 자금력이 떨어졌고, [[게르만족]]의 대규모 침공에도 항상 시달려야 했다. 동로마를 12세기 말까지 [[강대국]]으로 지탱해주던 그리스 및 소아시아, '로마의 빵 바구니'라 불리던 이집트 등 알짜배기 지역은 모두 동로마가 가져갔다. 지금이야 서로마 지역(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과 동로마 지역(그리스, 불가리아, 헝가리, 옛 유고 연방, 터키,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등)을 비교하면 쟁쟁한 [[선진국]]들이 포진한 서로마 지역의 경제력이 압도적이지만, 당시에는 농업 생산량과 교역량이 서방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동방에 비해 국력이 떨어졌다. 영국이나 스페인은 현대에도 농사짓기 썩 좋은 국가가 아니고, 프랑스는 농사짓기 좋은 땅이지만 당시에는 아직 개간이 덜 되어 숲이 많은 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대양 무역이 활성화되어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 오히려 세계와 더 연결이 잘 된 지역이지만, 지중해 무역과 동방 무역이 대세이던 당시까지만 해도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는 무역로에서 동떨어진 변방 신세를 면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현재 알제리와 튀니지가 위치한 북아프리카 지역이 당시에도 크기는 작지만 서로마 제국에서 가장 세수가 잘 걷히는 비옥한 땅이었다. 제국 분할 이후 50여 년간 서로마는 [[스틸리코]], [[콘스탄티우스 3세]][*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 ~ 421년). 서기 421년 호노리우스와 공동황제로 통치한 인물로, [[콘스탄티누스 3세]]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서 410년대의 혼란을 수습한 후, 서고트와 연합해 스페인의 알란족과 반달족을 공격하여 스페인의 상당 부분을 탈환했다. 이 사람과 [[갈라 플라키디아]] 황녀 사이의 아들이 바로 [[발렌티니아누스 3세]]였다.], [[아에티우스]] 같은 걸출한 사령관들의 노력으로 국가를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죽고 난 후 [[마요리아누스]]가 중흥을 시도하여 성공했으나, 잠시 뿐이었고 그마저도 권신 리키메르에게 암살당했다. 그후 무력한 황제들이 연달아 등장하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 [[오레스테스]] 등의 실권자가 황제를 쥐락펴락했으며 결국 [[오도아케르]]에 의해 어린 황제가 폐위당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동로마 제국은 수도 밖의 거의 모든 땅이 [[오스만 제국|적]][[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게 넘어간 상태에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수도가 함락되는 방향]]으로 화끈하고 장렬하게 멸망했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 과정은 사뭇 다르고 세계사적으로 상당히 특이한 경우이다. 전통적으로 속국이나 산하 이민족을 다루던 방식인 조약 혹은 동맹(foedus, 포에두스)의 형태가, 서로마 제국의 중앙정부에서 더 이상 이민족 통제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오히려 역이용당해서 하나하나씩 지방 속주의 영토와 서로마 군대의 주요 보직이 [[게르만인]]에게 넘어가다가 마침내 [[오도아케르]]가 동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형식을 빌려서 서로마 황제직 자체를 폐지함으로써 멸망한 것이다. 물론 한때 지중해를 장악한 그 이탈리아 본토는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유지했기에 이를 바탕으로 서로마가 치열하게 이 물결을 막아내려고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스틸리코, 아에티우스, 그리고 최후의 중흥 황제였던 마요리아누스 같은 인물들이 이를 토대로 최후까지 노력했으나 결국 이들이 죽은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서로마 제국은 천천히 무너져갔다. 어떻게 보면 서로마는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로마인 스스로 멸망한 감도 있다. 소설 《[[눈 속의 독수리]]》를 보면 칭제하라고 부추기는 부하들에게 주인공 인 [[파울리누스 가이우스 막시무스]]가 일갈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는 >'''"그 동안 로마를 다시 한번 강하게 만들겠다며 스스로 황제가 된 자들 중에 성공한 자들도 적거니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로 인해 로마가 더 약해지면 약해지지 약속대로 강해진 적이 없다."''' 라고 일침을 가한다. 그 말처럼 서로마 제국의 멸망 과정을 보면 로마인들이 자중지란을 벌이다가 이민족을 막지 못하고 무너진 경우가 너무 많았다. [[스틸리코]], [[아에티우스]], 보니파키우스, [[마요리아누스]] 등 한 사람이라도 성공했다면 서로마 제국의 중흥을 이끌었을지도 모르는 걸출한 인물들이 이민족을 상대로는 여전히 로마의 힘을 보여줬으나, 정작 죄다 내부의 중상과 내전으로 제명에 못 살았던 걸로 귀결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